제목 : 香과 냄새 만드는 외길 30년 - 韓佛化農(주) 이형섭(35회) 사장 등록일 : 2004-11-02    조회: 1056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경기도 용인시 구성읍 상하리3만평 부지에 일반산업이 아닌향료를 생산하는「한불화농」은언덕과 능선을 따라 서구적인 모습으로 여기저기 세워진 연구실과 실험실, 생산공장이 자연친화적으로 보였다. 회사전부가 공원이고 정갈한 느낌 뿐이다. 소음하나 없이 수출 한국에 이바지하고 있는 점버와 운동화 차림의이형섭 사장은 8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아직 젊음이 넘치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다.

「여기 처음 들어왔던 30년 전에 는 좋은 자리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버렸어. 주위 전부가아파트지요.」

사장실도 선배님의 취향을 보여주듯 검소하고 담백했다. 그러나 사장실에 있는 미술, 골동품 10여점은 문외한의 눈에도 고가품으로 보였다. 옆방 아가씨가 내어놓는 녹차도 향이 서려보인다.

「우리 회사가 만드는 향료는 세가지가 있어요. 제과, 음료에 들어가는 식품향료, 화장품에 들어가는 향장향료와 산업용 향료가 있는데, 산업용에는 소, 돼지, 닭 사료와 바다에 뿌려 고기가 모여들게 하는데 이용되지요.」

향료외길 30년을 걸어온 이형섭 사장은 처음 무역업무를 하면서 전매공사의 관련 기계와 외국산 담배를 취급했다. 그러면서 거기에 많이 들어가는 향료가 거의 수입이고 국내에는 생산산업이 없다는 점에 착안 했다.

「처음에는 불란서와 합자해서 회사를 세웠지요. 합자가 된 것이 운이 좋았으며, 그때 향료를 잘 모르는 불란서 사람이 회장이 되었는데 요행히 그때 매출이 좋아 그것을 보고 돈과 기술을 투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설립하자마자 정부가 그전에 수입했던 것을 개방하는 바람에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어려움도 있었지만 3년 뒤 내가 전 주식을 인수하게 되었지요. 그동안 우리가 기초적인 기술을 다 습득한 거지. 한국인들 참 우수해요. 그러나 응집력이 없어. 강아지 눈 뜰만하면 나가고.... 이곳은 엄청난 외국정보가 필요한데 우리 연구소에 있다가 나간 사람 30여명인데 거의 다가 실패했어. 이곳에는 무엇보다 시설투자와 인력개발이 중요해요.」

이사장님은 매일 아침 6시에일어나 자택이 있는 예술의 전당건너편 우면산을 1시간 30분가량 오르며 건강을 관리하신다. 안먹고 운동않는 것보다 잘먹고 운동하는 것이 건강비결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신다. 김치냄새 만드는 일은 외국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우리와 경쟁이 안되고 반대로 버터의 향과 냄새는 우리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외국을 따라 갈 수 없다는 사장님은 원료를 선진국에서 가져와 배합해 대량생산 하지만 아직도 외국제품이 좋고 한국제품이 나쁘다는 인식이 있다는 고충도 털어 놓으신다. ‘우리 것을 잘 안 사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기야 김치냄새 만드는 문제는 우리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 하신다. 유럽과 일본에서 원료를 수입, 생산해서 중국, 홍콩 등지로 수출하고 국내에도 롯데, 해태, 태평양 등에도 판매하고 있다.

「계성재학시절」하면 무엇보다도 의흥지구 노력봉사사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우리는 계성의 4학년제의 마지막이었지요. 학제 개편으로 34회와 같이 졸업했는데 의흥봉사때 제일 많이 고생한게 생각나요. 그 당시 밥을 적게 주어 식량창고에 가서 쌀을 훔쳐 밤에 밥해 먹고 사보타주를 일으켜 무기정학도 당했어요.」

이사장님은 재학시절 안해본 운동이 없을만큼 스포츠 만능보이였다. 심지어 악대부원까지 했다.

「한번은 씨름선수들이 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웃으니까 김상영 선생이‘야, 니 와서 해봐라’ 하길래 나가서 당시 선수이던 급우 김동호군을 눕협지요. 그뒤 제1회 경북학도대항전에도 나갔어요. 신도환 선생 때문에 유도선수도 했고. 재학시절 공부는 적당히 하고 개구장이 짓 많이했지. 축구부도 제일 먼저 만들었어. 축구는 포지션이 중요한데 실력이 아니고 힘의 논리로 하길래 빠져나왔어요. 야구부도 만들어 올대구팀과 8군팀 시합 오픈경기인 대구상고와의 대전에 내가 투수로 나갔는데 던지니 볼, 던지니 볼로 만루가 되었어. 그 다음부터 스트라익으로 던져 다 잡았지.」

이형섭 사장님의 생활신조는「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회사는 부채가 일체 없고 사장이나 이사도「은행이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투명하다. 운동삼아 하는 골프는 1968년부터 시작했다. 그 이듬해 한국골프협회장배 대회에 참가 2위를하기도 했고 사무실 벽에는 2002년 4월 홀인원한 증서도 있다. 지금의 건강도 재학시절 철봉을 즐겨, 힘든 대차륜도 했으며 육상선수도 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당시 모교에 100m코스가 없어 신명여고에 가서 연습했던 것도 기억한다. 한때 나무에도 관심이 많아 회사가 값비싼 수목을 많이 심었는데 관리소홀로 아까운 주목20여그루를 죽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단순한 향료보다「기능성 향료」를 개발, 생산성을 높일 계획으로 있다. 흰 까운을 입은 직원들이 연구소에서 선진국 못지 않는 향료를 개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소음과 매연이 없는 고부가 산업으로 국가경제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는 노익장의 건강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감동을얻기에 충분했다.

취재 : 글·이수남(50회) 사진·남기진(51회·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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